경부고속도로
대한민국 국토의 대동맥
건국 이래 최대의 난공사로 회자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는 1968년 2월 1일, 서울영업소 만남의 광장 자리에서 제 1공구인 서울~수원 구간의 기공식을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였다.
우리나라 경제개발계획의 상징으로 부각된 것은 물론, 우리나라 인구의 44%, 국민 총생산의 46%, 공업생산액의 61%를 차지하는 12개 시와 37개 군을 일일 생활권으로 묶어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건설업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1970년 7월 7일 대전~대구
구간 공사를 마지막으로 완전 개통되기까지 2년 5개월 동안 우리나라 건설사의 새로운 장을
기록해온 시간이었다.
길이 428km, 노폭 22.4m(4차선)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이 대형 사업을 위해 동원된 인원은
인부와 기능공을 포함하여 893만 8,000명에 이르렀고, 각종 중장비 165만대가 동원되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6톤짜리 대형 트럭으로 16,000,000대 분이 넘는 6,000만m의 흙과 바위가 옮겨졌으며,
철근 48,700톤, 시멘트 6,632,000포대, 아스팔트 465,000드럼이 투입된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극동건설은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가운데 4차선 아스팔트 콘크리트 도로82km를
포장했는데, 천안공구(경기도 오산읍 우리~충북 청원면 옥산면 오산리간, 소공구 7개를 비롯,
황간공구(충북 옥천면 청성면 묘금리~경북 금릉군 아포면 봉산리간, 소공구 5개)와
언양공구(경북 월성군 내남면 월산리~부산시 동래구 구서동간, 소공구 5개)의 도로
포장공사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가 완전히 열리던 날, 극동건설은 석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이 공사를 통해 축저간 도로건설 기술을 바탕으로 해외건설 진출의 새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